국가를 위해 싸웠지만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전쟁과 인간 - 한 중공군 포로의 회고록 - 장쩌스, 『나의 한국전쟁』
◇(국방일보)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30713/1/ATCE_CTGR_0020010009/view.do
-명문대 나와 자원 입대 6·25전쟁 참전
-강원 화천서 포로로 잡혀 거제도 수감
-미군 통역 맡아 동료들 처우 개선 힘써
-애국심 잃지 않고 귀국했지만 뜻밖 시련
-변절자 취급에 반동 지식인 죄목까지
-60년 지나 써내려간 기록엔 짙은 회한
▲장쩌스, 『나의 한국전쟁』 표지.
올해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됐다. 현재 중국은 6·25전쟁 참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국가를 설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중국이 한반도 전쟁에 뛰어든 것은 국운을 건 모험이었다. 중국 정부는 국가의 단결이 필요할 때마다 미국과 대등하게 싸웠던 전쟁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중국은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 국군과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2만1000여 명 중 3분의 1도 되지 않는 6004명만이 중국으로 귀환했다. 나머지 1만4000명에 이르는 포로들은 중국 본토행을 포기하고 대만을 선택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이었다. 마오쩌둥은 포로 선별 결과에 크게 분노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직전 금성지구에서 대규모 공세를 취했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국군과 중공군은 불필요한 피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휴전 후에 중국으로 귀환한 포로들은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귀환 포로들을 취조한 문서들은 문화대혁명 와중에 대부분 소실됐고, 귀환 포로들은 1980년까지 전혀 복권되지 못했다.
6·25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중공군 병사 장쩌스(1929~ )는 자신이 조국으로부터 받았던 대우를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2011년, 장쩌스는 참전 경험과 포로수용소 생활, 귀환 이후의 삶을 상세하게 적은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의 회고록 『나의 한국전쟁』(소명출판, 2022)은 최근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장쩌스가 집필한 회고록은 전쟁의 이면과 중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로 각계의 찬사를 받았다.
중국 명문 칭화대학 출신 엘리트인 장쩌스는 국공내전 때 공산당에 가입했고, 6·25전쟁에도 자원입대했다. 장쩌스는 중공군 제180사단에 배속돼 1951년 3월 21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의 부대는 하루에 100리씩 행군해 38도선에 이르렀다.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국군 3군단 포위에 나섰다. 그러나 화천에서 국군 6사단의 반격을 받아 궤멸했다.
▲화천 전투(파로호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공군. 필자 제공
▲거제포로수용소. 사진=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홈페이지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쩌스는 1951년 5월 27일 포로로 잡혔다. 그는 수원의 임시수용소를 거쳐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가장 큰 갈등 요인은 언어 문제와 포로들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장쩌스는 미군 장교의 통역을 맡았다. 미군 장교들은 영어를 구사하는 장쩌스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그의 통역을 신뢰했다. 장쩌스는 미군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중공군 포로들에게 군사기밀을 발설하거나 조국을 배신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사흘간 포로들에게 잡혀 포로가 됐던 도트(오른쪽) 거제포로수용소 소장. 필자 제공
포로 교환 문제로 전쟁이 길어지자 포로들은 동요했지만, 장쩌스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소장 도트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장쩌스는 통역을 맡아 더 큰 유혈 사태를 막았다. 장쩌스는 2년이 넘는 포로생활 내내 미군들과 의사소통하면서 포로들의 처우를 개선했고,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장쩌스는 그야말로 애국심이 투철한 군인이었다.
1953년 9월, 마침내 장쩌스는 석방됐다. 귀국 직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귀환 포로들에게 ‘자백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공산당원 사전에 ‘포로’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포로가 된 것은 기개를 잃은 것이고, 살아 돌아온 것은 인민에 대한 죄로 판명됐다.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불안해진 포로들은 서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당 간부는 장쩌스에게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말고 최대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장쩌스는 포로로 잡힐 때 갖고 있던 수류탄을 던지지 않은 사실과 포로수용소에서 통역을 맡아서 의사소통을 도운 사실을 솔직하게 적으면서 반성하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 자백서는 장쩌스의 삶을 처절하게 파괴했다.
가진 무기를 모두 소진하지 않은 채 포로가 됐고, 영어로 미군과 개인적인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장쩌스는 당적(黨籍)을 박탈당했다. 장쩌스는 중대장과 대대장에게 수용소에서 자신이 다른 포로들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노력한 점을 설명하면서 항의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귀환 포로들은 변절자 취급을 받았다.
장쩌스는 당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으나 당에서는 귀환포로들을 성가신 짐처럼 여겼다. 칭화대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광부가 될 생각까지 할 정도로 장쩌스는 취직하기 어려웠다. 그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과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당이 언젠가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리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대약진 운동(1958~1962)의 실패로 경제난과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마오쩌둥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개조운동을 전개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1962~1978)이었다.
마오쩌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숙청됐다. 언론과 출판이 제한되고 지식인들은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다. 학교 도서관의 책들이 찢겼고, 장쩌스는 반동 지식인이라는 죄목으로 어린 홍위병들에게 갖은 고초를 겪었다. 6·25전쟁 때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도 단상에 끌려 나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잦아든 후 장쩌스를 비롯한 귀환 포로들은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1980년 10월, 복권을 위한 재조사를 권장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료가 소실된 탓에 귀환 포로들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대만으로 간 포로들이 안락한 삶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귀환 포로들은 더욱 자괴감에 빠졌다.
21세에 압록강을 건넌 청년은 이제 90세 넘은 노인이 됐다. 그는 자신의 청춘을 바쳐 국가에 헌신했지만, 대가는 ‘인민의 적’이라는 낙인이었다. 회고록 곳곳에는 변함없는 애국심을 표명하는 문장이 반복되지만 그 행간에서는 짙은 회한이 느껴진다. 그는 국가가 자랑하는 역사에서 누락된 존재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