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역사관
6·25전쟁 개관 6·25역사관 6·25전쟁 개관
6·25전쟁 개관
    1.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에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3년 1개월 동안의 전쟁은 대한민국이 유엔 참전국과 함께 공산세력의 적화의도를 막아낸 ‘세계자유수호전쟁’이었으며,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전쟁 발발의 배경 및 원인

      제2차 세계대전 후 심화되고 있던 미.소의 냉전체제하에서 한반도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적인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한의 사회는 몹시 불안정하였다. 6.25전쟁은 이러한 남한의 정세와 스탈린의 세계공산화 전략, 모택동의 전쟁지원 약속 등에 고무된 김일성의 무력적화 통일 야욕에서 비롯된 기습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북한 군사력(1950. 6. 24 기준)

      구분 국군 북한군
      병력 103,827명 201,050명
      8개 보병사단 10개 보병사단, 2개 보병여단, 1개 전차여단
      전차 0대 242대
      화포 1,051문 2,492문
      항공기 22대 226대
      함정 36척 110척

      ※ 특히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은 국군의7배가 넘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기습공격 하였다.

      국제사회의 대한민국 지원

      구분 국가
      전투부대 파병국
      (16개국)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디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는 연인원 1만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의료지원국
      (5개국)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전시물자 지원국
      (32개국)
      과테말라, 도미니카, 에콰도르, 라이베리아, 레바논, 멕시코, 버뮤다, 베네수엘라, 이란, 대만,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스위스, 시리아. 아르헨티나, 쿠바, 아이슬란드, 엘살바도르, 오스트리아. 온두라스, 우루과이, 이스라엘, 자메이카,이집트, 인도네시아, 칠레, 캄보디아, 코스타리카, 파나마, 파키스탄, 헝가리
      전후복구 지원국
      (7개국)
      독일,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바티칸시티, 아이티, 파라과이, 페루
      지원의사 표명국
      (3국)
      니카라과, 볼리비아, 브라질

      ※ 6.25전쟁 당시 미국 등 16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며, 당시 전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63개국(98%)이 대한민국을 지원 하였다.

      전쟁의 경과

      구분 전선의 흐름 기간
      기습남침 북한의 기습남침, 서울피탈 3일
      지연전 한강선 → 낙동강선 1개월
      낙동강 방어작전 1.5개월
      반격 낙동강선 → 38도선 15일
      북진 38도선 → 압록강선 1개월
      평양 북방에서의 전투 1.5개월
      후퇴 평양 → 서울이남 1개월
      재반격 38도선을 연한 공방전 7개월
      교착전 휴전협상과 고지쟁탈전(38도선?휴전선일대) 2년

      ※ 전쟁초기의 전선은 전황의 유동성에 따라 각 한 달여 만에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렸다.

    1. ① 북한군 기습 남침과 낙동강선으로 후퇴(1950. 6. 25 ~ 9. 14)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6. 28)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참전(7. 1)하였지만 개전 한 달여 만에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다.(6. 25~7. 31) 이후 40여 일(8.1~9. 14)동안 낙동강 방어선을 필사적으로 사수하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② 인천상륙작전과 압록강으로의 진격(1950. 9. 15~10. 24)
      인천상륙작전(9. 15)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9. 28) 후 반격개시 보름 만에 38도선을 회복하였다.(9.16~9.30)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한 아군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압록강 인근의 초산까지 진격하여(10.1~10.26)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하였다.
      ③ 중공군의 개입. 새로운 전쟁(1950.10.25.~1951.7.9.)
      국군이 압록강(초산)까지 진격하고 있을 무렵(10.26) 이미 25만 여명의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와 국군과 유엔군의 등 뒤에서 기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0월 25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이듬해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2월초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평양철수(12.4)를 개시한지 한 달만에 다시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1.4 후퇴)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가 서울 재탈환(3.15) 이후 부터는 38도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④ 휴전협상과 휴전선 일대의 고지쟁탈전(1951.7.10.~1953.7.27.)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년 간이나 계속된 휴전협상 기간 동안 남북한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계속하였다. 전쟁개시 3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납북한은 휴전선으로 분단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한민국 지원 (단위 : 명)

      구분 국군 유엔군
      (미군)
      전사 137,899 40,667
      (36,940)
      178,566
      부상 450,742 104,280
      (92,134)
      555,022
      포로/실종 32,838 9,931
      (8,176)
      42,769
      621,479 154,878
      (137,250)
      776,357

      ※ 공산군 피해(추정) : 1,773,600여 명(사망/부상:1,646,000명, 포로/실종:127,600명)

      민간인 피해 (단위 : 명)

      사망 373,599
      부상 229,625
      납치/실종 387,744
      990,968
      기타 피난민:320만, 미망인:30만, 고아:10만

      ※ 북한 민간인 피해(추정) : 150만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