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양측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고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하였다.
6ㆍ25전쟁은 민족전쟁인 동시에‘침략전쟁’이며‘이념전쟁’의 성격을 내포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구성 한데서 비롯되었고, 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한국정부를 타도하고 대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개시된 전쟁이었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내 냉전은 더욱 고조되었고, 북한 정권이 무력으로 남침함으로써 냉전이 열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쟁 준비과정에서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과 긴밀하게 협의하였고 장비와 인력지원은 물론 전쟁개시 동의까지 받아내었다. 북한은 남침 직후 평양방송을 통해 남침사실을 은폐하면서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북한군의 남침은 조국강토를 순식간에 피로 물들게 하였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한 한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의 남침이 개시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최초 전황을 보고 받고 곧 긴급명령을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 초를 통해 시급히 필요한 탄약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고, 주미대사 장면을 통해 유엔에 지원을 호소하였다. 북한군은 최초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 한다는 전쟁목표를 수립하였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상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상실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주민들을 전시 동원 체제 하에 편입시켰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전쟁 발발 97일 만에 실지(失地)를 되찾고 전전(戰前) 현상을 회복하였다. 이어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 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제한 사항마저 제거하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혜산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3차 전역 이후 한계점이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아 다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게 되자 1950년 말경부터 내부적으로 정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과‘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을 벌였다.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 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즈음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와 같이 6ㆍ25전쟁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의 미군 대표가 각각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