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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6·25 당시 종교인 1145명 학살·납치

  • 날짜202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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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이 남긴 것들


6·25전쟁 당시 인민군 등에 학살당한 종교인들


인민군, 6·25 당시 종교인 1145명 학살·납치


◇ (월간조선│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 (기사내용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2206100042


⊙ 충남 논산 병촌교회, 예배를 보게 한 후 인원 파악했다가 밤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66명 집단학살

⊙ 전북 정읍교회 장로 및 우익인사 167명 불태워 죽여 … 전남 신안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구덩이에 생매장

⊙ 진실화해委, 종교인 학살사건에 대해 직권조사에 착수하기로


▲ 6·25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이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사진=전남 염산교회


올해는 6·25전쟁 72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은 무고한 희생을 불러온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는 37만여 명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좌익 세력들은 국군과 미군 이외에 ‘우익이거나 군경 가족, 인공 치하에서 반동으로 모함을 받았던 사람, 종교인’ 등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선정했다.

특히 6·25전쟁 시기 종교인들은 인민군 등 소위 적대 세력의 중요한 공격 대상 중 하나였다. 인민군과 적대 세력에 의해 전국에서 희생된 기독교인은 849명으로, 피랍된 177명을 포함하면 희생자는 총 1026명이었다. 여기에 천주교인까지 합치면 1145명에 달한다. 물론 이밖에 더 많은 희생자가 존재할 것이다. 1145명이라는 숫자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연구소(소장 박명수)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의뢰를 받아 발표한 〈6·25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인민군 등 적대 세력들은 종교인들을 개별적으로도 탄압·학살했지만, 집단학살 사례가 더 많다. 이들은 전국에서 이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중에서도 충남, 전북, 전남 지역에서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단학살을 가했다. 또 이들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도 종교인들을 죽였지만, 특히 퇴각 과정에서 더 많은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서울신학대 연구팀은 이와 같은 북한군과 공산당원의 기독교인 집단학살이 퇴각 과정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계획된 숙청이었다고 밝혔다. ‘종교 말살 정책’을 기조로 “기독교를 불순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라는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는 1920년대부터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가르치면서 ‘반공’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 박명수 연구소장은 “이 때문에 북한과 남한의 좌익 세력은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친미·반공 세력으로 규정하고 말살 정책을 펼쳤다”고 말했다.

특히 6·25전쟁 당시 김일성은 1950년 7월 전국에 ‘전과 불량자, 악질 종교 등’을 처벌할 것을 명령했는데, 악질 종교에 기독교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보고서에는 “기독교인의 숙청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지시 사항에 따른 것”이라며 “지시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이런 학살은 대부분 제대로 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도 했다. 현장에서 ‘사냥’ 형식의 만행이 난무했다는 것이다.

인민군·적대 세력 퇴각 과정서 종교인 무자비하게 학살



▲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한 종교인 학살 통계 자료. 사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950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처형 형식의 대량 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렸다.

〈1)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 때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 4)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5) 산간지대 마을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 경험자와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

이러한 지시를 받은 각 도당위원회는 9월경, 추석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전국적으로 학살을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도 이때 이뤄졌다. 특히 인민군 퇴각 과정은 각 지역에 따라 달랐다. 대부분의 인민군은 9월 말부터 퇴각을 시작했다. 그런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10월 초 퇴각했고, 바로 직전 신안군 도서 지역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유엔군은 인민군을 공격하며 빠르게 북상했다. 이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산간지대로 도피했다. 이들은 유엔군이 지나가고 나서 마을로 다시 내려와 우익 세력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좌익의 점령지대로 만들려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남 영광군이다. 산속에 숨었던 인민군이 다시 마을로 내려와 우익 세력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광군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당시 전국 많은 산간 지역이 여전히 미수복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낮에는 태극기를, 밤에는 인공기를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교회에 감금한 후 불태워 죽여


박명수 소장은 “이번 조사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죄 없는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는데,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사람들도 많이 속해 있었다”고 했다.

박 소장은 “1950년 9월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기독교인 66명이 북한군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공산당원들은 기독교인을 ‘예수를 믿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삽과 몽둥이, 죽창 등으로 구타하고 구덩이에 파묻었다”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광동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 전남 영광의 야월교회와 염산교회, 그리고 전북 지역의 교회들에서 일어났다”면서 “충남, 전남, 전북 지역에 집중된 것은 남한의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았고 교회가 그 지역공동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상임위원의 말이다.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의 기독교인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에서는 김방호 목사를 비롯하여 77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영광 야월교회도 교인 전체라고 할 수 있는 65명이 교회에 감금당한 채 전원이 불에 타 죽었다. 전남 영암군에서는 영암읍교회 교인 26명, 상월교회 나옥매 전도사 외 30여 명 등 가장 많은 교인이 집단학살로 순교하였다.”

이성영 병촌교회 목사는 “당시 치안대들이 교인들을 죽창이나 몽둥이로 무차별 학살했다”면서 “교회에서 예배를 보게 한 다음 인원을 파악했다가 야음을 이용해 집집이 찾아다니며 죽였다”고 말했다.

이성균 신안 진리교회 목사는 “제 조부님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희생됐다”면서 “전쟁 전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인민군 치하에서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사람들을 마구 학살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했다”고 강조했다.

‘기독교민주동맹’


인민군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지만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서울신학대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으로 끌려간 기독교인은 확인된 수만 177명이다. 이밖에도 확인되지 않은 기독교인 납북자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편적인 예로 인민군의 서울 점령 이후인 7월 10일경, 과거 경동교회 교인이던 김욱(金旭)이 종로 YMCA에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위원장으로 행세했다. 김욱은 8월 23일을 전후하여 많은 교인에게 집회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어 교인들을 유인하여 집단으로 납북했다. 김욱의 초청장을 받고 마지못해 불려 나갔던 김유순 목사가 그 피해자였다. 이때 지하에 숨었다가 자수한 교역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궐기대회에 나가서 남북통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러고 이틀 후 궐기대회에 참석했던 많은 교인이 검속(檢束)되거나 북으로 끌려갔다.

박명수 소장은 “북한이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은 이들을 공산주의 체제에 맞는 기독교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라며 “당시 북한은 서울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착각해서 그들을 데려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소장은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은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거나 북한 체제에 대해 ‘그들도 사람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고, 북한에 끌려가서도 말을 잘 안 들었을 것이다. 북한은 끌고 간 기독교인들을 대부분 숙청했다”고 덧붙였다.

 

선전 목적으로 기독교인 拉北


 


▲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사진=조선DB


박 소장의 말이다.

“북한은 이들을 끌고 가 친소(親蘇), 친공산주의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국제사회나 남한에 있는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전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김광동 위원은 “북한으로 데려간 기독교인들이 종교 지도자일 경우 충분히 선전 목적으로 데려갔을 것이다”면서 “이들을 데려가면서 그를 따르는 많은 일반 신도까지 데려갈 목적이었다. ‘너희 지도자도 공산주의를 선택했으니 너희도 따라와라’는 식으로 많은 기독교인을 데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 당시 전국에서 종교인들이 인민군과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당했다. 그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9월 27~28일 신자 16명과 가족 등 66명이 인민군과 적대 세력들에 살해됐다. 전북 김제 만경교회에서는 10월 1일 공산군 퇴각 후 우물에서 남녀 교인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15명의 신도가 쇠망치로 뒷머리를 맞거나 죽창에 찔려 사망했다.

전북 정읍 두암교회에서는 10월 26일 22명의 교인이 칼과 총으로 살해당했으며 예배당도 불태워졌다. 두암교회에서의 학살 한 달 전 북한군은 전북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 정읍교회 장로와 우익 인사 167명을 불태워 죽였다.

전남 영광 염산교회에서는 10월 26일~12월 4일 77명이 학살됐으며, 이외 전남 영광 야월교회와 법성교회, 전남 영암 구림교회와 매월교회 등에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된 것으로 조사됐다. 몸에 돌을 달아 바다에 빠뜨리고, 공동묘지에 생매장하고, 산 채로 불을 지르는 등 온갖 잔인한 수법이 동원됐다.

이밖에도 경남 울산 월평교회에서 6명, 강원도 철원 장흥교회와 철원교회에서 6명이 학살됐다. 이는 서울신학대 연구팀이 자료조사와 증언을 통해 밝혀낸 것이다.

 

6·25전쟁 시기 희생된 종교인 90%가 전라도인 이유는?



▲ 6·25 전쟁 시기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 기독교 신자 66명을 살해한 충남 논산 병촌교회의 순교자 기념탑. 사진=병촌교회


다른 곳에 비해 전라도 지역이 상대적으로 희생자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곳이 한반도 서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군산, 목포를 중심으로 남포, 신의주, 평양 등으로 퍼져나갔다. 또 다른 주장은 유엔군이 인민군을 밀고 북쪽으로 올라갈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산에 숨어 있던 인민군과 적대 세력이 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아 유엔군이 지나가자 산에서 내려와 민간인과 기독교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성영 병촌교회 목사는 “충남 논산군 성동면 병촌리의 경우 여운형의 가족인 여씨 문중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좌익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고, 좌우 갈등이 심한 편이었다”면서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들이 들고일어났고,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목사는 “이들은 기독교인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일가족까지 모두 학살했다”면서 “희생자 가운데는 임신부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성균 신안 진리교회 목사의 경우 당시 적대 세력에 의해 교회 장로로 있던 할아버지와 가족을 모두 잃었다.

이 목사는 “인민군이 우리 할아버지를 기독교인이라고 잡아다 고문을 하는 등 며칠을 감옥에 넣었다 집으로 돌려보냈다”면서 “그날 일반 신도들이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에 모였다. 당시 모인 신도가 20여 명 정도 됐었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예배가 진행됐다. 그런데 적대 세력들이 우리 할아버지 집으로 쳐들어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뒷산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가족을 죽이기 위해 미리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신도들까지 구덩이에 생매장했다”고 말했다.

기독교, 해방 직후 북한 사회의 중추 역할

북한은 공식적으로 교회와 성당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종교탄압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두고 있다. 물론 이는 눈속임일 뿐 실제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아니 종교를 탄압하고 있다.

북한은 언제부터 종교를 탄압했을까.


해방 직후 북한 기독교인들은 북한 사회의 중심부에 있었다. 특별히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 대다수는 일제와의 투쟁 경력과 아울러 미국 유학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 새로운 나라는 기독교적인 민주국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 또한 일본 당국도 자신들의 패전 이후 연합군의 진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조만식 장로, 평북 자치위원회는 이유필 장로, 황해 건국준비위원회는 김응순 목사가 선출됐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환영하며 민주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이 북한에 진주했고, 소련은 이들을 공권력으로 제압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를 만들도록 했다. 만일 이런 소련의 강제가 없었다면 북한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사회가 됐을 것이다.

목사 출신 강양욱의 변절


처음 북한에서는 서로 인정하며 공생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도 잠시 1946년부터 기독교와 공산주의 간의 본격 갈등이 시작된다. 1946년, 해방 이후 처음 맞는 3·1절 행사를 시작으로 이들의 불편한 동거는 깨지고 말았다. 김일성은 기독교인도 함께 모여 3·1절 행사를 같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응하지 않고 장대현교회에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후 조만식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북한 당국의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또 3월 5일 북한이 토지개혁을 시행하며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이 월남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하자 자신의 외숙부인 강양욱을 내세워 기존의 교회와 구분되는 ‘기독교 분리파위원회’을 조직했다. 이는 곧 공산주의에 순응하는 독보적인 기독교를 새로 만든 셈이다. 당시 김일성의 외숙부인 강양욱은 장로교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외가는 기독교 집안이었다.

김광동 위원은 “당시 깨어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만약 근대문명사회를 몰랐다면 공산주의에 순응하고 적응을 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들은 다시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싸움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도 1945년부터 50년까지 5년간 기독교와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라며 “일찍이 기독교가 자신들의 적대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이같이 무참히 학살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독교인 집단학살 사건 국가 차원의 첫 조사


6·25전쟁 당시 기독교인이 집단학살된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의 첫 조사가 시작된다. 1950년 말 북한 인민군 퇴각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집단 희생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지만, 그동안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조사로 당시 기독교 등에 대한 탄압의 구체적인 피해 규모와 역사적 배경 등이 규명될 것으로 보인다.

2022년 4월 26일 진실화해위는 제23차 위원회를 열고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인 등 종교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직권조사는 진실화해위 차원의 자체 조사를 의미한다. 통상 진실규명 신청을 받은 개별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많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경우 신청 여부와 상관없이 진실화해위가 직권으로 조사에 나선다.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는 이번이 세 번째가 될 전망이다. 지난 2월 ‘납북귀환 어부 인권침해 사건’ 조사를 의결했으며, 이날 ‘한국전쟁 전후 신안군 민간인 희생’에 대한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전후 인민군, 지방 좌익, 빨치산 등 적대 세력에 의해 기독교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탄압을 받고 희생됐다”며 “기독교 희생 사건은 역사적이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학살 피해의 원인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위원회에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배경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