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일본 간 국장급 회담이 1일 베이징에서 다시 열렸다. 주요 과제는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잘 풀릴 경우 북한에 대한 일본의 제재가 완화된다거나 국교 정상화 그리고 북한에 대한 일본의 100억 달러 지원 문제로 연결될 가능성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전망에는 물론 한·중 관계가 급진전하는 데 대한 북한과 일본의 견제 의도도 작용하는 것 같다.
1990년 전후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와 소련연방의 해체로 전 세계적 냉전체제는 종식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그 이전에 이미 중국과 베트남이 개혁·개방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오히려 북한정권은 폐쇄정책을 강화하고,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대량 아사와 절대 빈곤에 처해졌다.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다. 북·일 간 교섭으로 납치된 일본인들이 귀환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북한이 정상화되기를 기대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의 막무가내 떼쓰기 버릇도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부 비롯된 측면이 있다. 50년대 말부터 일본의 정부·적십자사의 도움으로 9만3000명의 조총련계 재일동포가 북한으로 갔다. 진행 과정에서 북한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해 이 사업은 북한이 독재·폐쇄정책을 강화하는 데 이용됐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80년대 초까지도 일본은 남과 북 사이에서 등거리외교에 집착했다. 때로는 북한의 불법행위까지도 눈감아 주려 하였다. 남북 사이에서 카드를 활용하면 일본의 외교역량이 커진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
이제 북한정권은 떼를 쓰기만 하면 무엇이나 통용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북한 자신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지원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일본도 국제사회의 그러한 기본 틀을 깨트릴 힘은 없다. 언젠가 북한이 정상국가가 되기를 기대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북한의 대일교섭에 조언을 해 둘 필요가 있다. 과거 일본의 남북한 간 등거리정책의 장기판 위에서 상대방의 불행이 나에게 득이 된다는 제로섬 논리를 청산할 때가 됐다.
본래 북한정권은 식민통치에 저항해 항일투쟁을 전개해 온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한 북한정권이기에 일본과 국교 정상화 교섭을 한다면 과거사를 명쾌하게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한·일 간에 체결된 조약의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1910년 8월 한·일 합병조약의 효력에 관한 것이다. 65년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한·일 합병조약은 이미 무효라고 규정하였으나 한·일 양측이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 측은 한·일 합병조약이 강박(强迫)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므로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해석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체결 당시에는 일단 유효하게 성립하였으나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 의해 비로소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조약 이전으로 돌아가 전통적인 국제법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다.
조약법 조약은 과거의 전통 국제법 이론보다 진보적이다. 교섭 대표에 대해 강박이나 사술을 사용한 경우의 무효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 간 힘의 차이에 의한 강박의 경우에도 무효로 본다고 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한국의 교섭 대표들이 주장을 완벽하게 관철시키지 못해 일본이 다른 해석을 하게 한 원인은 그 당시 국력이나 교섭력에서 한국이 열세였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하루빨리 일본 자본을 들여와 경제 건설을 해야 한다는 시급한 목표 때문에 절충안으로 타결한 셈이다.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자랑하는 북한정권이야말로 한국 정부의 선례를 따르지 말고 조약법 조약의 기본 원칙에 따라 강박에 의한 조약이 원초적으로 무효임을 관철시키기 바란다. 그럼으로써 한국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정리하기 바란다. 그러면 100억 달러 내지 200억 달러의 지원도 독립축하금이라든가 경제협력자금이 아니고 일본의 불법적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금으로 당당하게 받아 낼 수 있다.
이는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확실한 반성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솔직한 인정이야말로 주변 국가와 벌이고 있는 끝없는 알력의 근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동아시아 전체의 정상적인 협력관계도 진전될 것이다.
지금 남북한 GDP는 38배 차이가 난다. 실패한 북한정권이 대량살상무기로 연명을 꾀하고 있는 형국이다. 북·일 간 교섭으로도 기울어진 남북 간 불균형은 단기간에 되돌리기 어렵다. 하지만 교섭을 통해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태어나는 계기가 된다면 남북 불균형을 개선하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북한도 이 기회에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거듭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바란다.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중앙일보] 입력 2014.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