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이 다시 쓴 6·25전쟁 16大 쟁점
내쟁적 요소 지닌 국제전…스탈린이 휴전회담 막아
▣ (신동아 2020년 6월호|글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88636/1
어느덧 광복 이후 최대의 민족 참사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다. 이 계제에 이 전쟁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 가운데 16가지만 가려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전쟁이 남긴 유산을 앞으로 어떻게 청산하고 무엇보다 이 전쟁이 남긴 강고(强固)한 남북 대결체제를 와해시켜 궁극적으로 남과 북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로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작업은 훗날의 과제로 남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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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출발점: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
이 전쟁의 쟁점들 가운데 출발점은 명칭에 관한 논쟁인데,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전쟁의 명칭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학계에서 어떤 전쟁의 명칭을 정할 때 몇 개의 기준이 있다. 첫째, 전쟁이 일어난 장소 또는 국가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스파르타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명명했고, 19세기 초기에 미국이 멕시코의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멕시코와 벌였고 결국 미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이 전쟁에 저 유명한 알라모전투가 포함된다-은 멕시코전쟁으로 명명했다.
19세기 중엽 제정러시아가 터키의 크리미아반도를 군사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파병해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쟁은 크리미아전쟁으로 명명했다. 바로 이 전쟁 때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의 명성이 확립됐다.
20세기에 들어와 일제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마침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다가 패망하고 말았는데, 스스로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또는 ‘대동아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에 대항해 싸운 미국은 이 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명명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일어난 전쟁들을 살펴보자. 베트남에서 일어난 남·북베트남 사이의 전쟁에 미국이 참전했으며 결국 북베트남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명명했고, 이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전장(戰場)이 이웃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자 인도차이나전쟁으로 명명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중동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아랍권 사이의 전쟁은 경우에 따라 팔레스타인전쟁 또는 수에즈전쟁으로 불렀으나 전반적으로 중동전쟁으로 명명했다.
1970년대 영국이 포클랜드를 되찾으려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여 승리를 거둔 전쟁은 포클랜드전쟁으로, 그리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괴뢰정부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국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명명했다.
둘째, 전쟁의 상대방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고대 로마가 오늘날의 레바논 일대에서 상업국가를 세웠고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에 진출한 페니키아(당시 로마인들의 발음으로는 포에니) 사람들을 상대로 두 차례에 걸쳐 싸운 전쟁은 포에니전쟁으로 명명했다. 오늘날의 튀니지에 자리를 잡았던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 활약했다.
19세기 전반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된 연합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 전쟁을 나폴레옹전쟁이라고 불렀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부에 이미 정착해 국가를 세운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그 네덜란드인을 통칭한 보어(Boer)를 따서 보어전쟁이라고 불렀다. 훗날 영국의 총리로 선출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한 처칠은 이때 종군기자로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영국에 널리 알렸다.
셋째, 교전국 쌍방의 이름을 함께 넣는 방식이다. 유럽에서 프로이센(한문으로 普露西亞, 영어로 프러시아)과 프랑스가 벌인 보불전쟁이 그 한 보기다. 이 전쟁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알자스로렌이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이 지역을 프로이센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명명된 사례는, 아시아에서 청국과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 미주에서 미국과 스페인(한문으로 西班牙)이 싸운 미·서전쟁,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중·일전쟁 등이다. 중국이 통일된 베트남(한문으로 越南)을 상대로 벌였으나 승패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난 전쟁은 중·월전쟁으로 명명됐다.
넷째, 전쟁의 어떤 뚜렷한 특징으로써 명명하는 방식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청을 상대로 아편을 마구 팔아 아편중독자가 늘어나자 청에 수입된 영국의 아편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일어났고, 결국 영국의 승리로 귀결된 전쟁을 아편전쟁으로 명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비슷한 사례가 제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 전쟁’이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와 시리아는 복수심에 불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바로 이날은 유대인의 전국적 큰 행사 ‘욤 키푸르’ 곧 ‘성스러운 속죄일’이었다. 이스라엘이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었다.
다섯째, 전쟁의 기간을 중심으로 명명하는 방식이다. 14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 1세기에 걸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일어난 전쟁은 백년전쟁으로 명명됐다. 1967년 발발해 이스라엘의 승리로 귀결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끝났기에 6일전쟁으로도 불렸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모세 다얀이 세계적인 장군으로 떠올랐다.
여섯째, 많은 열강이 개입한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대표적 사례다.
전쟁의 명칭을 둘러싼 논쟁
그러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7개월에 걸쳐 진행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어떻게 명명돼 왔는가. 일본은 남북한 전체를 ‘조선’으로 통칭하는 관행을 적용해 ‘조선전쟁’으로 명명했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에서는 압도적으로 ‘코리안 워(Korean War)’를 사용했다. 프랑스어권이나 독일어권 그리고 러시아어권에서는 모두 ‘코리아의 전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개전 초기에는 ‘6·25사변’ ‘6·25동란’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변’이나 ‘동란’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국제정치학이 말하는 전쟁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곧 ‘한국전쟁’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명명은 우리로서는 어색하다. 흔히 ‘한국’이라고 하면 그것은 대한민국을 가리키는데,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안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인민에 의한 정의의 조국전쟁’ 줄여서 ‘조국해방전쟁’ 또는 ‘정의의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명명은 소련이 나치독일의 침략을 받아 거기에 저항한 전쟁을 ‘조국수호를 위한 위대한 애국전쟁’으로 부른 전례와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치게 북한 중심적인 것이면서 일방적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적 참극을 초래한 사실을 가리고 있다.
유엔군의 성공적인 반격으로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북한 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은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 아래 파병했는데, 이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명명이나 북한의 명명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명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두 자기네 입장에서의 명명이기 때문이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