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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조국 하늘 지켜낸 96세 노장… “폭탄이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다”

핏빛 조국 하늘 지켜낸 96세 노장폭탄이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튼, 주말-허윤희 기자의 발굴]

 

- 공군 최초 100회 출격 조종사

-‘6·25전쟁 영웅김두만 장군

 

(조선일보허윤희 기자)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2/18/MBN4RMJFSFCEVAKRW3M5P7OQ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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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 장군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F-51D 전투기 앞에 섰다. 6·25 전쟁 당시 그가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운 전투기와 같은 기종이다. 96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그는 "하늘 위에선 무념무상,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했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김 중위, 폭탄 10발을 갖고 가서 문산철교를 폭파시키고 오라!”

 

1950627일 오전 10. 김두만 공군 중위가 T-6 훈련기를 몰고 여의도 기지를 이륙했다. 비행기 날개 밑에 폭탄 걸이를 장착하고, 15짜리 소형 폭탄 10발을 매단 채였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 그에게 부여된 첫 임무였다. 날이 좋지 않았다. 1500피트 상공에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항공기가 균형을 잃고 회전하며 곤두박질쳤다.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비행기가 구름 밖으로 튀어나왔고, 폭탄이 분리돼 항공기와 함께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스핀 정지 조작을 하는 순간, 폭탄이 땅에 떨어져 폭발했어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죠. 나중에 귀환해서 항공기를 살펴보니 날개 밑이 온통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 파여 있었습니다.”

 

김두만(96) 전 공군참모총장은 마치 며칠 전 일을 떠올리듯 73년 전 그날을 얘기했다. 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엔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었다. 당시 공군이 보유한 항공 전력은 T-6 훈련기 10, L-5 4, L-4 8대가 전부. 반면 북한은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항공기 226대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공군은 가용 전력을 총동원해 맨손 폭격을 감행했다. 김 장군은 무기 장착이 불가능한 항공기는 후방석에 탄 조종사가 폭탄을 안고 가서 맨손으로 투하했다고 했다.

 

김두만은 6·25 때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한 전설이다. 195010월 여의도 기지 작전에 참가해 개전 초기 우리 군의 서울 탈환과 평양 입성에 기여했고,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대동강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도 출격해 전공(戰功)을 세웠다. 1952111F-51D 전투기로 대한민국 최초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웠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일 침착할 때가 출격하는 순간입니다. 조종복을 입고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무념무상(無念無想)입니다.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합니다.” 이후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을 거쳐 1970년 공군 최고 수장인 11대 참모총장에 올랐다. 2015년에는 88세 나이로 최초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후배 조종사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최근 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일본에서 자란 유년 시절과 공짜로 비행기 탈 수 있다는 광고에 속아 가미카제(자살 특공대) 대원으로 뽑힌 이야기, 전쟁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까지, 영화보다 박진감 넘치는 노병의 백년사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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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만 장군이 1952111일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워 동료들에게 축하받는 모습. /공군 제공

 

 

목숨을 건 비행

 

-6·25 발발 당일을 기억하십니까.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고 동료들과 영화 보러 외출을 나갔지요. 눈에 익숙하지 않은 전투기 2대가 굉음을 내며 김포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제 야크기였죠.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장병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고 했어요. 당시 T-6 10대가 여의도 기지 격납고에 있었는데, 북한군들이 격납고에 기관총을 퍼부어서 1대가 파손됐어요. T-6 항공기 10대는 6·25 직전 국민 성금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입한 대한민국 공군의 보물이었습니다. 연쇄 폭발로 다 날아갈 뻔했는데, 다행히 연료를 빼고 격납고에 넣은 덕분에 9대는 무사했어요.”

 

-전투기가 한 대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네요.

 

“1949101일 공군이 창설됐는데 미국에 T-6 훈련기 판매를 요청했지만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된다고 퇴짜를 맞았어요. 예산도 없어서 19505월 국민 성금 35000만원으로 캐나다산 T-6 10대를 구입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속제 T-6 훈련기를 건국기라고 명명했어요. 캐나다가 파견한 교관 1명이 조종사 요원 10명에게 T-6 훈련기 교육을 하는 도중에 전쟁이 터진 겁니다.”

 

-첫 임무가 문산철교 폭파였죠?

 

맥아더 사령부가 급하게 한국군에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제공하기로 해서, 선배 조종사 10명이 전투기를 인수하러 일본 규슈 비행장으로 떠난 직후였어요. 그때 중위였던 저는 T-6는 조종간도 못 만져본 상태였죠. 626일 저녁,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저를 불렀어요. ‘T-6를 전투에 투입해야겠는데 탈 수 있겠나?’ ‘타야죠, 타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1시간 연습하고 여의도에 착륙하니 바로 출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공군 전사(戰史)스핀(통제 불능 상태) 폭격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폭탄이 항공기에 매달려 있었다면 낙하 속도가 빨라져 항공기가 추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나중에 김정렬 총장께 보고했더니, ‘세계 항공 역사상 스핀 폭격을 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걸세!’라며 위로해 주더군요(웃음).”

 

-이후에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죠?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 있던 트럭을 폭격했을 땐, 폭탄을 투하하고 항공기를 트는 순간 소리가 났어요. 대공포에 직통으로 맞아서 충격으로 비행기가 뒤집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구멍이 커다랗게 나있어요. 탄흔이 조금만 위로 올라왔으면 내 다리가 날아갔고, 조금만 내려갔으면 좌측 연료 탱크가 완전히 폭발했겠죠.”

 

-그런 일을 겪으면 다음 출격할 때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 공군이 연이어 전사하자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가 많았어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냐며 대성통곡한 조종사도 있었죠.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대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어요. 근데 난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19,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과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의 북한군 보급 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산악 지대인 창도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윙맨(보조 조종사)이었던 후배 이일영 중위가 폭격할 때 대공포탄이 날아들었어요.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고,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지요. 잔해를 찾으려고 계곡을 헤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에서 강릉 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어요. 비행 생활 중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입니다.”

 

-이틀 뒤 한국군 최초로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는데요.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쳐줬는데,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어요. 100회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그걸 세면서 출격한 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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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김두만 장군은 핵 위협뿐 아니라 미사일도 성능이 점점 강화돼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결판날 것이라며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왼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이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공군이 가장 큰 전과로 꼽는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도 이끌었습니다.

 

승호리철교는 중국에서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 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 보급로의 요충지였어요. 첫날은 실패했고, 13일 다시 출격했는데 일대가 구름에 덮여 있어서 2차 목표인 황해도 이천의 교량만 부수고 돌아왔어요. 115사천으로 내려가 후배 조종사를 양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남 사천 기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철교 폭파는 후배들이 성공한 겁니다. 1편대장 윤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F-51D 6대가 적의 대공 포화를 뚫고 정확하게 표적에 투하해 철교를 폭파했죠.”

 

자살 특공대 투입 직전 살아남은 소년

 

김두만은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 교토에 살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소학교 4학년 때 경비행기를 처음 봤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행기 한 대가 학교 상공을 선회하며 재주를 부렸다조종사 목에 맨 마후라(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며 넋이 나갔다고 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