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주년…나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6·25 결정적 전투들] ② 다부동 전투
“대구를 사수하라!” 사상 첫 한미연합작전 눈부신 전과
백선엽 장군, “내가 선두에 설테니 후퇴하면 나를 쏴라”
(기사전문)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695114
■ 제공=국방일보 2010.06.07.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기로에서 1950년 8월 초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2군단 예하 15·13·1사단 등 3개 사단을 함창 일대에, 2군단 예하 3·10사단 등 2개 사단을 왜관 서측에 집결시켜 총 5개 사단으로 대구를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다부동의 혈전 기간에 국군의 병력 소모율이 너무 커서 단기간 훈련을 마친 신병이나 학도병으로 병력을 충원해야만 했다.
▲ 사진은 1950년 8월 1사단에 지원한 학도병 모습.
▲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전을 치르는 동안 유엔군과 국군이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전선을 점차 조정하면서 다부동 전투의 서막이 열렸다. 사진은 낙동강방어전 초기 낙동강 대안을 경계하면서 피란민 행렬을 주시하는 유엔군 장병들의 모습.
국방일보 DB
■ 국군의 전선 조정과 다부동 방어선 편성
육군본부에서는 낙동강방어선을 편성한 직후부터 전체의 중대한 작전 전환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1사단을 제외하고는 이미 강을 장애물로 이용할 수 없는 데다가 전체 방어 정면이 너무 넓어 부대 간 연결도 이루지 못하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 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각 사단에 하달했다. 이에 따라 국군 1사단이 12일 야간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다부동 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들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해 전술상 대단히 중시됐다.
국군 1사단은 13일 다부동 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15연대가 328고지 일대, 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 11연대가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했다. 북한군도 13일 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해 328고지로 공격하고, 13사단이 국군 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했으며,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고지를 선점하고 말았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이 미처 방어선을 편성하기도 전에 중앙이 돌파될 위기를 맞았다. 이는 부대가 진지를 전환하면서 전방에서 새로이 진지로 바로 진입하지 않고 후방에 집결한 후 역진입하는 전술적 우를 범함으로써 비롯된 결과였다. 국군 1사단은 그 결과로 인해 이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북한군은 8월 15일부터 총공격을 재개했다. 국군 1사단은 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했고, 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했으며, 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됐다.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B-29 98대의 융단 폭격이 실시됐다. 이 폭격은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 다부동의 위기와 미군 2개 연대의 증원
아군의 융단 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신주막~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 큰 위기에 놓였다.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미 8군은 즉시 미 8군 예비인 미 25사단 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했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북한군이 대구역 부근으로 향해 박격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대구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란령을 하달했다. 국군 1사단은 위기상황를 타개하기 위해 18일에 지원된 미 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 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미 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해 보·전 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1사단이 미군과 협조된 공격을 실시했다.
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했고, 12연대는 쌍방 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빼앗기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반복했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 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미 8군 명령에 따라 미 2사단 23연대가 두전동 일대에 배치돼 방어력을 보충했다. 육군본부에서도 국군 8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 일대에 배치했다. 이처럼 다부동 일대는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가 지원될 만큼 상황이 위급했다.
또한 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명~700명의 손실이 발생해 병력이 날로 감소하게 되자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또 이 무렵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들이 배치돼 전투원의 식사를 비롯한 탄막과 기타 보급품을 지게로 최전방까지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 북한군의 공세 약화와 최초의 전차전 전개
8월 20일 야간 적측에서 갑자기 중대한 작전의 변화가 있었다. 적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이동시켜 공격하도록 했다. 이로써 적은 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돼 공격력이 크게 약화됐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의 위협이 가중돼 위기를 맞고 있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8월 21일부터 점차 다부동의 전황은 점차 호전돼 갔다. 이날 야간의 일로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6·25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됐다는 것이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11연대로, 주공을 미 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해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했다.
미 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해 적 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해 적에 대응했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 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하면서 불꽃을 튀겼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27연대 장병들은, 불명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맞은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해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 해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했다.
날이 밝자 진전에는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과 수대의 트럭 그리고 1300여 구의 시체가 확인됐다.더구나 다음날 오전 적 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11연대 지역으로 작전 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 의지는 극도로 저하됐다. 12연대는 이날 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해 마침내 유학산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 마지막 위기의 극복과 전과의 확대
미 8군과 육군본부의 조치로 다부동의 방어력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23일에 적 1사단 1연대는 국군 1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741고지를 점령하고 또 일부는 가산까지 침투했다. 이들은 11연대 지휘소의 기습에 이어 그 부근의 미군 포병진지를 공격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미 27연대와 볼링장 계곡에서 공격을 계속해 신주막을 점령하는 한편, 10연대와 미 23연대는 우인접 6사단에 배속된 독립기갑연대, 15연대와 동시작전을 전개해 가산 일대로 침투한 적을 격퇴하고 다시 741고지를 점령함으로써 8월 공세 마지막에 조성된 다부동 동측방의 위기를 수습했다.
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미 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돼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했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돼 거의 접촉을 단절했으며, 귀순한 포병 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전사상자 1500명이 발생, 총 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있었다.
1사단은 28일 수암산도 피탈 10일 만에 탈환했다. 결국 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돼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야 점령한 결과가 됐다. 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해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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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