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진호 전투’를 기억합니다.
(사)6.25공원국민운동본부에서는 6·25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자유 수호의 전쟁을
기억하고자 본 영상물을 시리즈로 올립니다.
본 영상물을 통해 「장진호 전투」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6·25전쟁의 교훈을 되새겨봅시다.
여러분의 많은 시청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자료출처 : 유튜브 소피니언 디데아에서 영상공유)
https://www.youtube.com/watch?v=-3TDCK6j8QU&t=184s
(장진호 전투 1부) 인천의 영광, 그러나 맥아더의 치명적 실수 "이상한 북진"
https://www.youtube.com/watch?v=8hfpQ0V8A2M
(장진호 전투 2부) 중국군의 1차 공세 "북한군이 아니라 중국군 이었다"
다음은 「장진호 전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위키백과에서 인용된 자료를 일부 올립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에서 인용)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A7%84%ED%98%B8_%EC%A0%84%ED%88%AC
장진호전투
■ 개요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또는 장진 저수지 전역, 장진 저수지 전투[c]는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미국 해병대와 중국군이 장진호에서 벌인 전투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이 전투의 지명을 장진이 아닌 "초신"(chosi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에 의한 것이다.[10][11] 유엔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인 1945년, 한국을 점령한 이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진이라는 지명도 이런 방식으로 읽히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 전쟁에 참여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d]이 북한 북동쪽으로 침투했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가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공격했다. 혹독한 겨울에 잔혹한 17일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30,000명[2]의 유엔사령부 병력이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곧 포위되었고, 마오쩌둥의 유엔군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4]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이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해병대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예봉을 맡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컸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희생을 치르며 포로가 되는 동안, 서쪽의 해병대는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 배경
1950년 중반, 미국 제10군단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조선인민군의 연속적인 궤멸 이후 한국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12] 유엔사령부는 북한과 남한을 1950년이 끝나기 전에 통일할 의도로 북한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했다.[13] 북한은 통과가 어려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는 유엔군을 2개의 집단으로 나누는 원인이 되었다.[14] 미국 제8군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한으로 진격했고,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했다.[14]
이 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군에 몇 번 경고를 보낸 이후 분쟁에 개입했다.[15] 1950년 10월 19일, 대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 하에 몰래 국경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들어왔다.[16] 장진호에 도착한 첫 부대는 중국인민지원군 제42야전군으로 이 부대의 임무는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유엔군의 공세를 막는 것이었다.[17] 10월 25일 진격 중이던 대한민국 제1군단이 장진호 남쪽의 황초령에서 중공군과 만났다.[18] 원산에 상륙한 이후 제10군단의 미국 제1해병사단은 제124사단과 11월 2일 전투를 벌였고, 이 격렬한 전투로 중공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9] 11월 6일, 중국인민지원군 제42야전군은 유엔군을 장진호로 유인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0] 11월 24일,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동쪽의 진흥리를 점령했고, 서쪽의 유담리도 점령했다. [21]
제8군 구역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이 벌어지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제8군에게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2]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맥아더는 제10군단에게 장진호 서쪽을 공격하고 만포진-강계-희천 보급선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23][24] 이에 화답하여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11월 21일 계획을 수립했다. 미국 제1해병사단이 유담리를 통해 서쪽으로 진격하는 한편, 미국 제7보병사단이 진흥리 우측방을 방호하기 위해 연대 전투단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국 제3보병사단은 후방의 치안을 확보하는 한편 서측방을 방호하기로 했다.[25] 이로 인해 제10군단의 전선은 643km의 길이로 얇아졌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