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죄…그 국군포로는 50여년을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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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한 국군 장병들이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전장에서 군대를 이끄는 장군,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국가적 결단을 내리는 대통령…. 전쟁의 역사는 공식적 지위를 가진, 힘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발자취가 대부분이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초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에 남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6·25 전쟁도 마찬가지다. 최전선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아픔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남북 정상이 약속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2년만에 흔들리는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태씨(89)는 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가 2001년 귀환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50년 동안 놓지 않았다. 그를 최근 서울 방배동 사단법인 물망초 사무실에서 만나 50년에 걸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 장병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다. 게티이미지
◆인권 대신 죽음의 그림자만 가득했던 포로 생활
1954년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지만 김씨는 눕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사방 1m 크기의 징벌 독방.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김씨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탈주였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붙잡힌 남측 공작원들로부터 남한 소식을 들은 김씨는 13년형을 받고 수감된 교화소(교도소)를 탈출했으나 잠복한 경비대원들에게 체포돼 독방에 갇혔다.
김씨는 1948년 3월 경기 포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원들의 절도있는 태도와 멋진 군복을 보고 나이까지 속여가며 군인이 됐다. 동두천 초성리 소재 7사단 1연대 3대대에 배치된 김씨는 대대장 연락병을 거쳐 의정부 사단본부에 있던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됐다. 당시 이등중사(하사)였던 김씨는 부대와 함께 양주 덕정에 도착, 산꼭대기에 올라가 대기했다. 오후 4시에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로 38선 일대로 북상하던 보급차량이 전복되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
다음날 중화기 중대가 왔다. 105㎜ 야포 10문과 박격포 등이 동두천, 적성, 고랑포를 향해 포사격을 했다. 포격을 받은 북한군은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굶주린 채 싸우던 김씨는 인근 농가를 찾아갔다. 농민들은 “고생한다”며 보리밥을 줬다.
▲ 6·25 전쟁 초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서울이 28일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북한군은 120㎜ 박격포를 쐈다. 직경이 2m에 달하는 구덩이가 패일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박격포탄에 부대원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하루 정도 지나니 시체 썩는 냄새가 곳곳에서 풍겼다. 포위된 상황에서 중대장이 교전 도중 부상했다. 김씨는 다친 중대장을 업고 산을 내려오다 30일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북한군 4사단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동두천과 덕정 방면을 공격했다. 국군 7사단의 포천, 동두천 방어선은 25일, 의정부 방어선은 26일 무너졌다.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했고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와 광진교를 폭파했다. 한강 이북에서 철수 명령조차 받지 못한 채 싸우던 국군은 뿔뿔이 흩어져 퇴각했다.
김씨가 북한군에 끌려가니 대대 작전참모, 통신참모, 정보참모도 붙잡혀 있었다. 연천으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은 김씨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회령으로 옮겨졌다. 옛 일본군 군마훈련소를 개조한 수용소에는 1500명의 포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인류사회발전법칙’을 비롯한 공산주의 관련 사상교육을 받았다.
생활환경은 열악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수용소에서는 전쟁 상황을 알 수 없었다. 30명이 머물던 침실 바닥에는 볏집을 넣은 자루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볏집에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식사는 잡곡에 시래기국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대여섯 숟갈 뜨면 다 없어졌다.
많은 포로들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굶주림에 지쳐 수용소 인근에 있던 돼지풀을 베어 소금물에 끓여 먹은 포로들은 몸이 붓다가 죽었다. 자고 일어나서 빗질을 하면 이가 한 사발씩 나왔다. 포로들의 피를 빨아먹는 이였다. 최소한의 생존조차 위협받는 수용소에서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4개월 정도 사상교양을 받고 탄광으로 가니 중공군들이 있었다. 동복을 지급받은 포로들은 중국으로, 평안북도 등으로 흩어졌다. 김씨는 1951년 초 평안북도 백마로 이동해 ‘해방전사’로서 훈련을 받으며 몽고말 두 마리를 키우게 됐다. 북한군은 몽골에서 지원받은 말을 ‘무언의 전우’라 칭하며 중시했다.
백마에서 김씨는 도주를 시도했다. 전선으로 가면 남한으로 갈 수 있을거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평안남도 대동에서 제지를 당했다. 북한군은 “이탈자가 많으니 원대복귀해서 생활하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복귀해서 자아비판을 한 뒤 때를 기다렸다.
1953년 5월 강원도 회양으로 이동해 정찰훈련을 받았다. 전선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으면 남쪽으로 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쪽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정전협정을 앞둔 7월 18일에 동료 대원의 밀고로 체포됐다. 25일 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반역자’라는 이유로 징역 13년에 선거권 박탈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 유엔군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죽은 지도 옛날이오”
원산·평양·함흥교화소에서 보낸 13년은 참혹했다. 겨울에는 동복만 입은 채 추위에 떨었다. 북한 출신 수감자들은 3개월에 한 번은 친척과의 면회를 통해 차입을 받았지만, 혈혈단신이었던 김씨는 도와줄 외부인이 없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북한은 평양복구건설을 시작했다. 김씨도 건설에 투입돼 남포제련소 내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식사는 강냉이에 콩이 들어간 밥과 된장 시래기국이 전부였다. 정월 초하루와 공화국 창건일에만 쌀밥 두 끼가 나올 뿐이었다.
일은 많고 고된데 밥은 적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갔다.
당시에는 남한에서 1952~1953년 북한에 침투시켰던 공작원들이 많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은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남한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고 국가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 ‘남한은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김씨는 1954년 3월 함흥교화소에서 또다시 도주했다. 죄를 지은게 없는데 징역 13년의 형벌은 너무나 억울했다. 하지만 잠복한 경비대에 잡혔다. 보름간 독방 생활을 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200626516901 (이하 중략 / 원문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