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北 억류된 채 참혹한 삶 국군포로의 귀환, 시간이 없다 [6·25 70주년 '잊혀진 그들']
http://www.segye.com/newsView/20200621513305
①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 / 교화소 갇혀 고된 노역 시달려 / 가족들까지 성분 불량자 낙인 / 1994년 이후 귀환 포로 80명 / 2010년 1명 끝으로 아예 없어 / 대부분 고령… 생존 확률 낮아 / 탈북 국군포로 노사홍·한재복씨/ 북한 당국 등 상대로 소송 제기 / 방송사 등 北에 낸 저작권료 20억 / 변호인 “승소 땐 공탁금 강제집행” / 최소 7만여명 국군포로·실종 추정 / 北서 군대 강제편입·중노동 시달려 / 가정 꾸리면 가족도 이동 등 제한 / 사회적 관심 식어 잊혀진 존재 우려
1954년 교화소(교도소)의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지만 대한민국 이등중사(하사) 출신 김성태(현재 89세)씨는 눕지 못한 채 앉아있어야 했다. 그가 있는 곳은 사방 1m 크기의 징벌 독방.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소변도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김씨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탈주였다. 김씨는 수감된 교화소를 탈출했지만 잠복해 있던 북한 경비대원들에게 체포돼 징벌 독방에 갇혔다. 눕지도 못하는 독방 생활은 15일이나 이어졌다.
국군포로 출신 김씨는 21일 세계일보 취재팀과 만나 당시를 떠올리며 “(그 안에선) 꼼짝 못할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눈 감으면 자는 거다. 사람이 아니라 해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1966년 만기 출옥한 김씨는 함경북도 온성의 추원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2001년에야 탈북했다.
김씨는 1948년 3월 경기도 포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원들의 절도 있는 태도와 멋진 군복을 보고 나이까지 속여가며 군인이 된 그였다. 경기도 동두천 초성리 소재 제7사단 1연대 3대대에 배치된 김씨는 대대장 연락병을 거쳐 의정부 사단본부에 있던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됐다. 이등중사 김씨는 부대와 함께 경기도 양주 덕정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대기했다. 6월28일 북한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중대장이 교전 도중 부상했다. 김씨는 다친 중대장을 업고 산을 내려오다가 6월30일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된 김씨는 1953년 7월25일 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 반역자’라는 이유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은 뒤 간난신고 끝에 2001년 어렵게 귀환할 수 있었다.
6·25전쟁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유엔군사령부는 북한군·중국군에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국군 규모를 8만2318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1954년까지 진행된 포로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은 8343명에 불과하다. 최소 7만여명의 국군이 포로로 남았거나 실종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유엔군과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지만 북한은 그때마다 “다른 인원들은 전향했다. 국군포로는 없다”고 일축했다.
시간이 흘러 1994년,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가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조 소위의 탈북은 북한 주장이 거짓임을 온몸으로 증거했다. 조 소위는 남한 품에 안겨 12년을 산 뒤 2006년 사망했다. 이후 김씨의 경우처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80명의 국군포로가 조국의 품에 안겼지만, 2011년부터는 귀환 행렬도 끊어졌다.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의 실상 등 구체적인 사항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등 관심마저 사그라들었다. 6·25전쟁이 70주년을 맞았지만 국군포로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가 돼가고 있었다.
1994년 돌아온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그들, 국군포로
21일 돌아온 국국포로나 탈북자의 증언 및 각종 자료 등에 따르면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았다. 북한군에 강제 편입됐고, 제대 후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북한은 1956년 ‘내각결정 143호’를 통해 국군포로들에게 공민증을 발급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북한 출신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43호’ 또는 ‘43호’라 부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차별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친 체제 재정비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은 통제구역 내 공장이나 협동농장, 광산 등으로 추방됐다.
미귀환 국군포로들은 북한 내 체류가 길어지면서 결혼을 하는 등 가족을 꾸렸다. 하지만 가족들도 성분불량자 가운데 최하위로 분류되어 교육과 사회적 이동이 엄격히 제한됐다. 1990년대 북한 전역을 덮친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식량난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아 사소한 병에 걸려도 쉽게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초기 북한군에 포로가 됐던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갇혀있던 그는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착수한 전후복구에 강제동원됐다. 당시 김씨에게 주어진 식사는 강냉이(옥수수)에 콩이 들어간 밥과 된장 시래기국이 전부였다. 정월 초하루와 공화국 창건일에만 쌀밥 두 끼가 나올 뿐이었다. 일은 많고 고된데 밥은 적으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붙잡힌 남측 공작원들로부터 남한 소식을 전해들은 김씨는 교화소에서 탈주를 시도했다가 붙잡혀 징벌 독방의 고역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고령화로 생존 확률 더 낮아져… “시간이 없다”
최근 4반세기 동안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 생존자는 지난해 9월 기준 24명이다. 귀환 국군포로 숫자는 1994∼1999년 8명에 불과했지만 2000년 한 해에 9명으로 늘었다. 2001년과 2002년엔 각기 6명이었다. 2004년엔 14명에 달했지만 2005년부터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2010년 1명을 끝으로 국군포로가 귀환했다는 소식은 없다.
국방부는 “1953년 정전협정을 기준으로 해도 60년 넘게 세월이 흘러 국군포로들의 연령이 대부분 고령”이라며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 귀환은 이전보다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입장이다. 2010년 이후로는 국군포로들의 연령이 90세 안팎에 달할 정도로 고령화가 진행돼 자력으로 귀환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탈북자와 귀환 국군포로의 증언을 토대로 생존 추정 국군포로 규모와 명단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국군포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남한 내 가족이 생존을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 거주 국군포로와 그 가족의 신변이 위협을 받을 수 있고 신원확인도 어렵다는 이유로 관련 자료를 전면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군 소식통은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벌여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봉환하고 실종자를 찾기 위해 수천명의 참전용사들을 상대로 증언을 청취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국군포로들의 고령화로 시간이 없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송환을 촉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명예회복을 원한다” 북한에 손해배상 소송도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북한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탈북 국군포로 중 노사홍(91)·한재복(86)씨는 2016년 북한 당국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탈북 국군포로가 북한 지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송 변호인단을 이끄는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은 21일 세계일보와 만나 “다음달 7일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면 국군포로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처음 소송했을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고 ‘북한과 잘 지내야 하는데 부적절하지 않으냐’는 지적도 있었다”면서도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북한과 김 위원장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국군포로들의 소망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정부 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소송을 한 국군포로들이 귀환 당시 국방부나 국가정보원 조사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 등에 대해 지난해 사실조회를 신청했지만 유의미한 답을 얻지 못했다”며 “당사자와 탈북자 증언 및 역사적 자료를 모아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재판을 치렀다”고 토로했다.
김 변호사는 2016년 평양에 1년 넘게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가족이 북한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북한은 5억달러(약 580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낸 사례를 참고했다고 한다. 그는 승소 이후의 계획에 대해선 “국내 방송·출판사들이 북한 영상·저작물을 사용하고 북한에 낸 저작권료가 법원에 공탁돼 있는데 약 20억원 정도다. 그걸 강제집행할 것이다.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김 위원장과 북한의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